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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나씩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우선 책을 읽고 느꼈던 것을 같이 공유하고 싶습니다. 시간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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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2.01.26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김원영

이 책은 김영하북클럽 1월 도서이다. 

올 한해 김영하작가님 북클럽 라이브방송에 참여하고 싶어 읽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책을 읽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즐겁다. 

 

이 책의 저자이신 김원영변호사님, 작가님은 <희망 대신 욕망>을 읽고 알게 되었다. 그 때도 깊은 인상을 받았었다. 그 후로 김초엽 작가님과 낸 <사이보그가되다>를 읽게 되었다. 두 분 작가님 다 좋아하게 되었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읽으며 작가님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씨실과 날실이 섞여 하나의 완성된 옷감이 되는 순간을 느끼게 되었다. 그 느낌을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완성된 연극이나, 뮤지컬, 춤을 보는 느낌이다. 글로 사람의 마음에 작은 파동을 일으키다가 어는 순간 큰 출렁임을 만들어낸다. 

 

56. 반면 우리가 지금까지 명료하게 정의하지 않고 사용해온 용어인 '존엄dignity'은 품격과 대비된다. 대한민국 헌법 제 10조를 비롯해 세계인권선언문, 독일 기본법(헌법) 제 1조등 세계의 여러 규범이 인간의 존엄성을 지위나 역할, 신분과 상관없이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지니는 권리의 기본 전제이자 핵심 원리로 규정한다. 

 

58. 1948년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세계인권선언은 "모든 인류 구성원의 천부의 존엄성과 동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세계의 자유, 정의 및 평화의 기초이며"로 시작한다. 우리나라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진다고 규정한다. 모든 인류와 모든 국민이 동등한 수준으로 보유하는 것이 존엄이다. 

 

67. 서로를 인격체로 존중하는 상호작용은 실재를 공유하면서 그 존중을 강화한다. 중략. 타인이 나의 반응에 다시 반응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타인을 존중하게 되며, 나를 존중하는 타인을 통해 나 자신을 다시 존중하게 된다. 

71. 인간의 존엄성이 가장 극명하게 빛나는 순간은 서로가 서로의 연기를 이해하고, 상호작용하면서 서로를 존엄한 존재로 대우하는 때이다. 품격이 상대방을 적절하게 접대하는 연기에 의해 구성된다면, 존엄은 상대를 환대하고 그 환대를 다시 환대하는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다. 우리가 본래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서로를 대우한다기보다는 그렇게 서로를 대우할 때 비로소 존엄이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91. "열심히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 않겠습니다"라는 선언이야말로 적극적 부정의 한 예이다. 중략. 능청스럽고, 유머러스하고, 지적이고, 신체적결함을 보완하는 정신적 매력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는 압박, 사무실의 생수통을 갈지 못하는 대신 인사성 바르고 동료들의 생일이라도 잘 챙겨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심적 부담감. 이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일이다. 중략.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가진 것이 없다는 부정을 선언하는 힘. 거기서 우리는 타인 지향성을 넘어선 진정성의 한 형태를 본다. 모든 것을 부정하는 시선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해야 한다. 그 가능성은 이제 '수용'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타자의 시선으로 나를 보는 것을 완전히 부정하고 오로지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결국 나의 몸, 운명, 삶, 실존에 대한 수용을 전제로 한다. 

 

나를 수용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내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은 어디서 부터 시작해야할까? 외모, 취미, 일, 가족, 삶의 이상에 대해 하나씩 돌아보자. 

 


137. ‘장애를 수용한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분명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142. 수용은 나의 자발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삶의 전체적인 기획 및 그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와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점에서도 믿음과 큰 차이가 있다. 무엇인가를 수용한다는 행위는 그 개별적인 행위 하나에 대한 태도에 그치지 않는다. 수용은 우리 삶의 전반적인 방향과 연결된 윤리적인 결단이므로,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유리한 이유state-given reason가 있어서 믿는 일종의 '전략적(정신승리적) 믿음'과 구별된다. 

 

144.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장애가 있는 몸, 미적 기준에서 벗어난다고 여겨지는 신체를 수용했다고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혐오나 피해의식에 기초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이 세상이 구축해놓은 외모의 위계질서에 종속되지 않으며, 앞으로의 삶을 외모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나 억압, 혹은 피억압자로서의 의식과 트라우마에 짓눌리지 않은 채 살아가겠다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입장)'를 수용한 것이다. 

 

149. 장애라는 정체성이 어떤 산물이라기보다는 장애라는 경험에 맞서 한 개인이 작성해나가는 '이야기' 그 자체라면, 우리가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일은 하나의 국면이 아니라 긴 삶의 시간 동안 그것을 '써나가는' 일이 될 것이다. 

 

153. 정체성의 수용에 성공한다면, 그는 장애와 질병으로 인한 정신적, 신체적 특질을 가지고 살아갈 자기 삶에 대한 책임을 부담할 것이다. 여기서의 책임이란 걷지 못하는데도 억지로 걸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걸을 수 없다고 해서 자신이 부자유하고, 가치없고, 존엄하지 않은 존재로 여겨지는 상황에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의 존엄을 위해 투쟁한다. 중략. 나에대한 그런 손가락질의 원인은 세상의 잘못된 평가와 위계적 질서이지만, 그에 맞서 내 존재의 존엄성과 아름다움을 선언할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 이것이 '정체성을 수용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취하는 실천적 태도이다. 

 

274. 우리가 한 사람을 '본다'고 할 때 그 행위는 그 사진을 찍는 행위보다 초상화 그리기에 가깝다. 특히 당장 내 앞에 있는 그 사람을 볼때가 아니라 기억을 떠올릴 때 더욱 그렇다. 가족이든 연인이든, 아무리 친숙한 얼굴이라도 구체적인 '사실'들이 머릿속에 스냅사진처럼 상기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얼굴을 생생하게 떠올리는데, 어딘가 불문명한 선들로 이뤄진 한 사람의 형상이, 오랜시간 그 사람과 만나며 끌어 모은 세부 사항들로 합성된 이미지처럼 나타난다. 

 

300. 우리는 누구나 홀로 아무런 의미망과도 연결되지 못하는, 도움의 손길조차 없어 보이는 수직의 땅굴을 파고 들어가는 듯한 절망의 순간을 겪을 때가 있다. 하지만 수직으로만 파고 내려가는 줄 알았던 굴속에서 어떤 사람은 조금 방향을 트는 데 성공한다. 그가 각도를 틀어 수직 방향을 벗어나면 이제 각자의 동굴은 평행하기를 머추고, 마침내 두 사람 이상이 특정 지점에서 만나는 일이 가능해진다. 그렇게 사람들이 만나 대화를 나누고 힘을 합칠 때 (지하에서나마) 비로소 공동체가 건설되는 것이다. 

 

언젠가 땅속 저 깊은 곳에서 만난 우리는 서로 경험을 나누고, 고통을 공유하고, 아무 의미도 없는 역경의 연속인 줄 알았던 삶이 사실은 객관적인 가치를 생산하는 제법 흥미진진하고 고유한 삶이라는 확신을 가지기 시작했다. 수직으로만 파 내려가던 동굴은 이제 힘을 합쳐 수평으로 향한다. 곧 수직으로 내려오던 또 다른 동굴들과도 만난다. 격자무늬의 동굴들이 이제 나름의 구조를 이루고 세계를 형성한다. 한순간 여러 곳에 격자 구멍들로 햇볕이 들기 시작했다. 

 

305. 집단에 기초한 투쟁의 정치는 통쾌해 보이지만 장애나 성별, 인종, 성적 소수성이 우리를 설명하는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장애를 수용하고, 지인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존중받고, 법의 영역에 침투해 들어가 고유한 권리와 제도를 발명하더라도 여전히 스스로를 혐오스럽고(타인은 물론 자신에게조차)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 이는 장애가, 혹은 '잘못된 삶'이라고 평가된 바로 그 속성이 우리의 전부가 아니므로 당연한 일이다. 장애를 가진 내가 잘못된 살이 아니라는 사실, 실격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느라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쓴우리는 바로 그 장애를 가진 자신을 보듬고 돌보는 일에, 사랑하는 일에 종종 실패한다. 

 

310. 괴물이 될 필요는 없다. 당신의 자녀나 형제에게 장애가 있고 당신이 그를 수용하기 얼워하더라도, 그들은 어머니, 아버지, 누나, 동생인 당신을 사랑할 것이다. 당신이 장애를 수용하고 역겨을 돌파하는 당당한 삶을 보여주지 못하더라도 당신의 부모, 형제, 연인, 친구, 이웃은 여전히 당신을 사랑할 좋은 이유를 가질 것이다. 중략. 자신을 수용하고 돌보려 하지만 결코 완전하지는 못할 이 '취약함'이야말로, 각자이 개별적 상황과 다른 정체성집단에 속해 있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분모일 것이다. 

 

312. 국가나 정부, 혹은 정치인들이 엘리베이터를 덜 설치하고, 알츠하이머에 걸린 노인을 위한 시스템을 갖추지 못하고, 차별적인 법률을 제정한다 해도, 바려 옆에 있는 나의 가족, 연인, 친구, 혹은 버스에서 우연히 만나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창출하는 상호작용의 무대에서 우리는 인격적 존재로 대우받고 서로를 세심하게 존중하는 경험을 나눈다. 당신이 버스에서 만난 한 장애인에게 보인 작은 존중의 표현은 주위에 있던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나아가 그가 자신의 장애를 수용하는 밑거름이 된다.

 

313. 존엄의 순환은 그렇게 시작되고, 그 순환 속에서 존엄은 더 구체화되고, 더 강해지고, 더 중요한 가치가 된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길을 보고 그를 더 사랑하게 되듯이, 우리는 나를 존중하는 상대방을 보고 그를 더 존중하게 되고, 나를 존중하는 법률을 보고 그러한 법의 지배를 기꺼이 감내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나를 더 깊이 사랑하고 관용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존엄하고, 아름다우며, 사랑하고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인 것이다. 누구도 우리를 실격시키지 못한다. 

 

 

 

 

 

Posted by 시간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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